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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서양 중세사 3화) 샤를마뉴의 치적과 카롤링 르네상스

by 곤솔이 2023. 3. 10.

 

 

샤를마뉴의 치적

 

피핀의 아들 찰스 대제 곧 샤를마뉴는 카롤링왕조를 대표하는 위대한 왕이었다. 그는 이탈리아반도의 롬바르디아왕국을 멸망시키고 동쪽의 바바리아인, 서쪽의 색슨족 등을 정복하였으며 피레네산맥을 넘어 에스파냐 일부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켰다. 이는 오늘날로 따지면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독일과 이탈리아반도를 포괄하는 대영토였다.

 

샤를마뉴는 광대한 제국을 200개가 넘는 주로 나누고, 그 책임자로서 '백'을 두었으며 국경지역과 군사적 요충지에는 군대 지휘관으로서 '공'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샤를마뉴는 이들 지방통치자들의 권력남용과 왕권에 대한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왕의 사자들'로 불린 감찰관을 두어 주기적으로 지방을 순시하도록 했다.

 

카롤링 르네상스

 

샤를마뉴의 치적은 영토의 통합과 안정된 정치체계의 구축만이 아니었다. 그는 성직자와 궁정관리들을 교육할 학교를 세우고 알퀸과 같은 당대의 대학자들을 초청하여 문화적 부흥을 꾀했다. 당시의 성직자와 학자들은 성서의 연구를 통해 기독교문화의 전파와 체계적인 교리확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고대문헌들에 대한 보존작업이 수도원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 전해오는 많은 고대문헌들의 최고본이 당시에 씌여진 필사본이라는 사실은 찰스 대제 때의 문화사업의 성과를 잘 말해준다. 그의 문화사업은 카롤링 르네상스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로마 붕괴 이후 중세 초기에 만연한 문화의 황무지 상태를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카롤링 르네상스는 고대의 문헌들 속에 담긴 인간중심적인 정신을 포착하지 못하고 단연 기독교적인 성격이 우세했다는 점에서 후일의 르네상스와 비교된다.

 

샤를마뉴의 치적과 영예는 그가 800년에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제국의 황제관을 수여받음으로써 그 절정에 달했다. 그의 대관은 게르만족 세속국가와 기독교의 제휴를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로써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로마문명의 몰락 이후 야기된 유럽의 혼란상황을 매듭짓고 바야흐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향한 기반을 공고히 닦은 셈이었다.

 

기독교 자체로 볼 때에도 로마 가톨릭과 프랑크왕국의 확고한 제휴는 중대한 결과를 야기시켰다. 즉, 로마 가톨릭이 비잔틴제국과 결별함으로써 기독교세계가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과 비잔틴제국의 그리스정교로 양분되는 분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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