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왕국과 로마가톨릭 사회는 중세 유럽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이다. 본 포스팅에서는 프랑크왕국과의 발전과 로마 가톨릭 문화의 융합에 대 알아보도록 하겠다.
프랑크왕국의 부흥
여러 게르만 왕국들 중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 중세 사회 형성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과는 단연 프랑크 왕국이었다. 프랑크 족은 라임 강 중류 및 하류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5세기 후반에 갈리아 지방을 석권하여 프랑크 왕국을 수립했다.
프랑크 왕국이 다른 게르만족의 왕국들에 비해 장기적으로 안정된 국가를 유지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들이 있었다. 우선 프랑크 왕국은 다른 왕국들과는 달리 본래 거주지인 라인강 유역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확대해 나갔기 때문에 피정복민 지배를 위한 인력과 물자를 지속적으로 보급받을 수 있었다.
반면 동유럽 지역에 거주하던 많은 게르만족들은 그들의 거주 지역으로부터 원거리 이동을 한 탓에 원활한 통치를 위한 충원과 보급이 어려웠다. 또한 다른 게르만족 왕국들이 비잔틴 제국이나 이슬람교도의 침입에 직접 노출된 지역에 위치했던 반면, 프랑크 왕국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인 여건 이외에 프랑크 왕국의 강성한 국가로 성장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프랑크 왕국이 다른 게르만족 국가들과는 달리 피정복민의 문화와 쉽게 융합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을 스스로 조성했다는 점이다.
즉, 다른 게르만족 국가들은 로마 카톨릭의 이단으로 여기던 아리오스파로 개종하여 피정복민들과 종교적 마찰을 불러일으키고 문화적인 융합을 이루기 어려웠던 반면, 프랑크 왕국은 로마인들이 신봉하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해서 문화적 갈등을 줄일 수가 있었다.
프랑크 왕국이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비정 로마인과의 문화 융합을 용이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후일 프랑크 왕국과 로마 가톨릭 사이의 제휴를 위한 초석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족의 문화와 로마 문화를 융합시킴으로써 새로운 이론 문화를 창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프랑크 왕국의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메로빙 왕조의 창시자인 클로비스 왕이었다. 그는 프랑크족을 통합하여 갈리아 지방을 정복하였으며 특히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할 기독교도와 로마 교황으로부터 협력을 받을 수 있는 유리한 기반을 조성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왕국의 분열과 내분 속에서 왕들이 영향력을 잃어가고 대신에 왕실의 최고 관리인 궁제에 왕국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부상했다. 특히 궁제 찰스 마르텔은 이슬람교도들과 벌인 '투르-프와티에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기독교 세계의 보호자로 부각되었다.
세속보호자를 찾는 로마교회
8세기 당시, 로마 교황도 자신과 교회에 대한 강력한 세속보호자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로마 교황의 세속적인 후견 세력은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다.
그러나 교황권에 대한 황제의 잦은 침해 ,삼위 일체설을 둘러싼 교리상의 마찰, 그리고 특히 황제 레오 3세의 우상 파괴령이 발단이 되어 로마 교황과 비잔틴 제국 황제가 결별하게 되었다. 우상 파괴령은 예수와 성인들의 형상이나 조각상을 우상으로 간주하여 그 사용을 금지시키는 법령인데 이는 종래 그것들을 이용하여 게르만 족에게 기독교를 전도하던 로마 가톨릭에 대해 제약을 가하는 것이었다.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회의 제휴
프랑크 왕국과 로마 카톨릭의 역사적인 제휴는 찰스 마르텔의 아들인 궁제 피핀 때, 구체화되었다. 피핀은 751년에 로마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실권을 진 자와 무능한 왕이 계승자 중 누가 왕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는 물론 궁제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피핀이 자신의 권력의 정당한 명분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피핀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던 교황은 그와의 제휴를 기대하고 피핀의 입장을 지지했다. 따라서 피핀은 주교의 축성을 받으며 왕위에 올라 피핀 3세로 카롤링 왕조를 창시했다. 그리고 피핀은 교황의 협조에 대한 보답으로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룸바르디아인을 물리치고 이탈리아 중부의 땅을 빼앗아 로마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것이 바로 후에 로마 교황령의 시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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