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이야기

종교개혁의 배경 :: 프로테스탄티즘과 가톨릭의 경쟁

by 곤솔이 2023. 7. 3.

누구나 알다시피 현재 기독교는 가톨릭에서부터 분열되어 나왔는데 그 역사적 배경에는 정치, 사회, 문화, 경제적 관계가 뒤얽힌 종교개혁이 있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종교개혁의 시작과 윤리, 그리고 가톨릭과 대립의 역사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본다.

 

칼뱅의 종교개혁

▶︎ 초기자본주의로의 길을 걷고 있던 당시의 유럽 사회 분위기는 종교개혁의 움직임을 더욱 촉진했다. 세속군주들은 교회의 막대한 토지재산도 노렸으며, 몰락하고 있던 봉건귀족과 자본의 투자를 모색하던 자본가들이 이에 가세했다. 종교개혁의 와중에 일어났던 독일 기사전쟁, 영국국교회의 성립과 함께 정치, 경제적으로 성장했던 영국의 지주세력 등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중산층은 종교적 자유를 제한 세금으로부터의 자유, 경제활동과 기술개발 및 이자획득의 자유와 일치시켰다. 도시세력이 유력했던 남프랑스지역에 확산되었던 칼뱅주의는 엄격한 도덕적 규약과 예정설에 입각한 은총의 신비를 설교했는데, 보다 봉건적인 집단에 입각해 있던 루터주의를 점차 대체해 나갔다.

칼뱅
칼뱅

프랑스 태생의 칼뱅은 과격한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전사한 취리히의 츠빙글리를 계승하여 제네바에서의 종교개혁에 성공했다. 인간의 구제는 이미 신 의해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펼친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구제를 확신하면서 세속적인 직업활동과 합리적이고 금욕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교리는 당시 경제적으로 상승의 길을 걷고 있던 중산층의 호응을 받아 영국 네덜란드 등지로 전파되었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비판

▶︎ 베버(Max Weber)와 토니(R.H. Tawney)를 비롯한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들은 16~17세기 자본주의의 동기를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찾으려 했다. 그들에 의하면 기존의 완만한 가치와 대립된 기준을 가지고 있던 부르주아는 경제적 산출자임을 자부했으며, 새로운 상업문명을 받아들인 칼뱅주의는 부의 축적, 자유방임, 직업소명의식의 근거를 제공했다. 또한 17세기의 청교도들은 칼뱅의 가르침을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로 발전시켰다. 프로테스탄트가 취한 견해는 물론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비판자들에 의하면 경제적 문제에 관한 한 프로테스탄트의 태도는 가톨릭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비판자들은 근대 초의 자본주의는 종교 이외에도 많은 동기를 제공받았으며, 루터와 칼뱅의 기본신학은 근대 경제학보다는 중세적 형태를 암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경제적 도덕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칼뱅의 규율은 오히려 자본주의를 제약하였고, 그것을 초보적 형태로 유지하려 했을 뿐이라고 했다. 또 다른 비판자들에 의하면 네덜란드 영국 동부, 뉴잉글랜드 및 프랑스 위그노(Huguenots)지역에 확산되었던 청교주의(Puritanism)는 칼뱅주의가 상업자본주의와 특별히 연관되었다는 전제에 모순되는 상황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스페인의 박해로 남부 네덜란드와 영국 동부로 피난한 프로테스탄트는 대부분 숙련된 장인이었지만 자본가는 극히 일부였다. 또한 부유한 상업엘리트는 전반적으로 자유주의적이며 반 교권적이었지만 카톨릭에 대해서만큼이나 프로테스탄티즘의 신정정치에도 흡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판자들은 오히려 사회 하층의 소외된 집단으로부터 과격한 형태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추종자들이 출현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경제적 발전으로 말미암은 번영과 침체의 교차 속에서 유랑민들이 속출했으며, 종교적 박해로 수많은 장인들의 유랑이 추가되었다고 본 것이다. 강요된 유동성과 불안정은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는 과격한 종교를 출현시켰으며, 이른바 위그노지역의 주민들도 대부분 물가상승으로 고통받는 하층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구체적 사실에 입각해 볼 때, 새로운 종교가 자본가집단을 유인했다는 베버 등의 이론에는 다소 과장된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의 실천 및 사회적 습관은 훗날 자본가집단의 급속한 성장에 기여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선택과 예정의 교의는 절약과 근면, 절제에 입각한 경제적 성공이 신의 호의의 명백한 증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각별한 호응을 얻었으며, 당시의 광범위한 사회집단을 고무했다.

 

종교개혁과 그 영향력

▶︎ 종교는 군주의 권한강화를 위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해 주었다. 유럽 각국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세속지도자로서의 종교 곧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종교개혁이 추진되면서 국가는 교회를 대신하여 신의 대리인이 되었다. 교회개혁가들은 대부분 보수주의자로서 하층집단의 봉기로부터 기존의 세속권위를 방어했다. 루터주의는 북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등지에 군주권 강화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확산되어 일시적으로나마 유럽 전역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프랑스 절대왕정에 대항했던 칼뱅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선언했지만 실제상으로는 교회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일종의 신정정치를 지향했다.

 

중앙집권화를 꾀했던 영국의 튜더 왕조가 독자적 영국의 종교개혁인 영국국교회를 설립한 현상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왕권의 확립을 꾀했던 헨리 8세는 아들을 낳아 주지 못한 에스파냐의 왕녀 캐더린과 이혼하고 궁녀인 앤 볼린과 결혼하려 하였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왕실과 가까웠던 교황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헨리는 영국교회를 로마로부터 분리시키고, 스스로 그 수장임을 선포했다. 그는 여기서 왕권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수도원으로부터 몰수한 토지로 영국 전역에 광범위한 토지시장을 개설함으로써 중산층의 지지도 확보했다.

 

카톨릭의 종교개혁

▶︎ 종교개혁은 가톨릭이 교세를 회복하려는 자체 개혁작업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종교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가톨릭 종교개혁의 선봉에 섰던 것은 에스파냐였다. 1540년에 확립된 예수회는 때마침 신대륙과 아시아 등 외방전교에 주력하여 가톨릭세력의 회복과 확장에 기여했다. 이러한 활동은 명분상으로는 기존의 가톨릭권에 대한 명목적인 통치력을 행사하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입장을 보여주지만, 보다 현실적으로는 국민국가적 통일과 신대륙을 발견한 에스파냐의 상황을 반영하기도 했다. 교황청 역시 개혁에 나섰다. 1956년까지 지속된 트렌드의 공의회는 교황의 지상권을 확립했다. 공의회는 성직자의 결혼 등 이미 관례화되었던 행위에 대한 입장을 정립했으며, 성찬, 신성한 은혜, 신앙에 의한 정당화와 같은 쟁점에 대한 교의를 확립했다. 화해 및 타협의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했던 공의회는 종교재판소와 신성로마제국의 후원에 힘입어 예전의 보편적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의 결과, 진지한 신앙과 확고한 주도권을 겸비한 개혁 교황들이 출현했는데, 그들은 이교탄압을 위하여 외교, 설득, 힘 등의 여러 방법을 적절히 사용했다. 종교분쟁은 때로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에서 벌어지는 초민족적 외관을, 때로는 민족 간의 경쟁이라는 외관을 띠었다. 가톨릭권 안에서도 로마교황청과 개별국가의 민족주의적 경향 사이의 마찰은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분쟁을 촉진했다. 프랑스의 갈리칸 (Gallican) 교회는 전통적으로 민족주의적이었으며 외관상 반교황적으로까지 보였다. 칼뱅주의와 루터주의의 분열 역시 심화되었으며, 독일·프랑스·네덜란드 등은 전쟁으로 종교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정치적으로 필요했던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관용은 용납되지 않았다. 여기에 정치적 갈등 및 경제적 대립이 뒤얽혀 16세기 후반의 프랑스 위그노전쟁과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을 거쳐, 17세기 초에는 30년 전쟁 (1618-1648)이라는 대규모 국제전쟁이 벌어졌다. 루터의 개혁 이후 100년 이상에 걸친 종교전쟁을 겪은 유럽은 30년 전쟁이 끝난 1648년에야 안정되었다.

개신교 교회

 

종교개혁의 역사적 의의

▶︎ 16세기 말을 기준으로 볼 때, 프로테스탄티즘은 북부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영국, 스코틀랜드, 스위스 등지의 북서부 유럽을 확보했다. 반면 가톨릭은 프랑스, 스페인, 이 탈리아, 바바리아와 오스트리아 동지의 남부 유럽과 독일, 보 헤미아, 폴란드 등 남동부 유럽을 확보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톨릭지역이 중앙집권적 통일이 미비한 지역이었으며, 자본주의화의 정도에 있어서도 보다 후진적이었다.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한 교과들을 통틀어 개신교라고 부르는데 이들을 탄생시킨 종교개혁의 의미는 비록 교회의 통일은 파괴되었으나 기독교신앙은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다시 강화되었다. 종교개혁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프로테스탄트가 기독교신앙을 심화시키고 내면화시켰으며,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에 발전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한다.

 

또한 종교적으로 관용의 태도를 출현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가 특별히 더 심화된 신앙에 입각했다고는 볼 수 없으며,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교파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발전에 긍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종교적 관용 역시 오랜 종교분쟁에 거친 끝에 생겨난 것이다. 오히려 종교개혁은 인간지성의 성장에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했다. 각 교과의 독단적인 교리, 그리고 세속적 가치의 부정과 신에 대한 몰두는 자유로운 사고와 학문 및 예술의 발전을 위협했다. 루터는 악마를 두려워했으며, 칼뱅 역시 사회통제를 위해 당시 대중적이던 마녀사냥에 집착했다. 종교개혁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중세 기독교세계의 통일을 파괴함으로써 근대국가를 비롯한 모든 근대적 발전의 길을 보다 순조롭게 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촉진한 데에 있을 것이다. 특히 칼뱅계통의 프로테스탄트는 근대적인 직업관과 금욕적인 생활윤리를 제공하여 근대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전세사기 범죄유형 7가지

 

전세사기 범죄유형 7가지

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전세사기 범죄유형 7가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세사기 범죄에는 어떤 유형이 있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본문을 참고해 주세요. 전세사기 범죄유형 전

plus2.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