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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생애

by 곤솔이 2023. 1. 16.

우리가 보통 이토 히로부미를 떠오릴 때 생각나는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원흉에서부터 민족의 원수같은 느낌이 있지요. 우리가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는 많은 공부를 해왔지만,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선 자세히 모르는 것들이 많은데요. 이 포스팅에서 간략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

 

서양의 기술과 문화를 다 받아들이려했던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야마구치 현,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원래 성은 이토가 아니라 하야시였으나 아버지가 이토 가문의 양자로 들어간 후, 이토로 성을 바꿔 이토 히로부미가 되었는데요. 일본 근대 우익의 창시자라 불리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뛰어 든 것은, 일본의 위정척사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존왕양이 운동때였는데요. 


후에 서구문물을 닥치는대로 받아들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정책노선과는 정반대의 운동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존왕양이 운동은 위정척사와는 달리 서양을 배척하되, 기술과 문화를 모두 받아들이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우리의 동도서기론과도 차이가 있지요. 동양의 정신은 유지하되, 기술만 받아들이자는 것도 아니고 서양의 어지간한 문화까지도 모두 흡수하려 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존왕양이 운동을 자신의 정치에 매우 영리하게 이용했습니다. 자신의 정적을 배신자 명목으로 숙청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존왕양이를 주장하던 사람들 중에서도 적극적으로 서양을 배척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1862년 12월에는 영국공사관에 방화를 했을 정도였죠. 하지만 이후 이노우에 카오루에 영국유학을 다녀오면서 유럽의 문물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이렇게까지 크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앞으로 동양이 서양의 기술과 문화를 하루빨리 받아들이지 않으면 서양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될 것을 꿰뚫어보게 됩니다. 

 

메이지 유신의 공신이 되다

한편 일본에서는 조슈내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에도 막부와 서양 4대강국간의 신경전이 일어나고 결국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일본 세모노시키 항은 무참하게 파괴되며 서양과 굴욕적 강화를 맺게되는 것입니다. 서양과 동양의 군사력 차이를 절감하고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그들과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나 결국 강화를 맺게 되면서 그는 에도 막부를 무너뜨릴 것을 결심합니다.  이토는 다카스키 신사쿠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번의 주도권을 빼앗으며,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반 막부세력과 함께 막부와의 전쟁을 선언합니다. 결국 1868년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항복을 받아내며 에도 막부를 멸망시키게 되죠. 이른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습니다.

 

40년간 일본 정계의 요직을 다 거쳐본 이토 히로부미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이토 히로부미는 학제, 징병, 지조개정 등 모든 부문에서의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고 서양 제국주의 열강을 벤치마킹하여 자본주의 체제, 군사력체계를 급속도로 강화해나갑니다. 그와 동시에 정부에서도 각종 요직을 차지하며 오쿠마 시네노부,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차세대 권력자로 우뚝서게 되는데요. 그는 유럽 유학생활을 경험으로 삼아 세계 외교문제를 보는 눈이 탁월했으며, 교육을 먼저 일깨워야 나라가 부흥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토는 1869년 효고 현 지사로 지내면서 도쿄와 교토에 일본의 중심적인 대학을 설립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서양식 대학을 설립하여 서양식 엘리트를 양성화하여 가장 먼저 강력한 군사적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는 것이 서양열강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었고, 어설프게 일본식을 주장하기보단 철저하게 서양의 문명, 제도, 교육을 추종했습니다.
그는 미국, 유럽에 대한 시찰도 게을리하지 않아서 1871년부터는 자신이 직접 강대국을 돌아다니며 몇년 간 시찰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토는 심지어 서양의 근본정신인 기독교도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적극적인 주장을 펼치다가 정적들에게 빌미를 잡혀 천황모독으로 숙청당할 뻔한 적도 있었죠.

 

정적을 축출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다

1873년 정한론이 터졌을 때는, 조선을 서둘러 공격해야 한다는 측의 의견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좀 더 길게 보고자했습니다. 당장의 근대화와 군사력 발전을 우위삼아 조선을 성급하게 쳤다가는 그것이 불러일으킬 세계정세의 파장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좀 더 체제를 곤고히 하고자 했죠. 이후, 정치적으로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이토는 공부성 초대장관시절에는 일본의 근대공업에 철저하게 힘을 쏟게되는데요. 이는 일본의 군사강국화에 지대한 힘이 되어줬습니다.


1878년 무렵에는 메이지 유신의 중심세력이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사망하게 되면서 이토 히로부미가 37살의 젊은 나이로 메이지 정부의 중심권력자가 됩니다.
그는 재무장관 오쿠마 시게노부와 함게 내무장관을 역임하면서 권력다툼을 벌이게 되는데요. 메이지 14년 정변에서 오쿠마 시게노부를 영국의 사주를 받고 천황을 모독했다고 하면서 축출해내고 명실상부한 일본 최고 권력자가 되는 데 성공합니다. 그의 나이는 불과 40세밖에 안됬었죠.

 

일본최초의 헌법을 만들다

최고 권력자가 된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제정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빨리 깨우치게 되는데요. 입헌군주정을 즉각 도입하자는 오쿠마의 급진론보다는 신중하면서 치밀한 그의 성격처럼 시간을 두고 일본의 헌법토대부터 제정하려고 힘을 씁니다. 이토는 헌법에 대한 초안을 직접 만드는 작업에 돌입했고 유럽에서 현지조사를 통해 자신들에게 프로이센 헌법이 맞다고 판단하여 이를 벤치마킹합니다. 그는 입헌제 도입에 앞서 먼저 내각제도를 창설하며 스스로 일본 총리대신에 오르는데요. 이후 1889년에 천황에게 절대 신으로서의 명분을 법으로 규정해놓은 일본 제국 헌법을 제정하게 됩니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만든 헌법이나 다름없었으며, 외형적으로는 근대적 입헌군주제의 헌법이지만 실질적으로 천황이 신적인 주권을 가진다는 일본 특유의 정신에 입각한 슈퍼 헌법이엇죠.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총리대신을 4번이나 역임하게 되는 동안 일본 군부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조선합병에 온건적이었던 이토, 조선인의 손에 사망하다

이 무렵, 일본은 조선을 두고, 한일합병을 할 것인지 보호국으로 삼아 착취를 할 것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게 되는데요. 이토 히로부미는 이 무렵 조선에 대한 온건노선을 선택하며, 조선에 대한 독립은 유지하되 보호국으로 삼겠으니 조선은 안심하라는 선전을 벌이는 등 조선인의 반발을 잠재우는 것에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조선인의 눈에 그 말을 믿을 수 없었고, 이토가 대한제국의 총감으로 부임하자 그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실책이었죠. 그는 1909년 러시아와의 외교를 위해 만주시찰을 나가던 길에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 정부의 재무상 코콥초프와 의장대에 사열했다가 우리의 안중근 의사에게 피격당하게 되는데요. 당시 총에 맞았던 이토는 응급처치를 받으며 누가 쏘았냐고 물었습니다. 한국인이 쐈다는 말을 들은 이토는 "바카나야쓰!"라는 말을 남기며 사망하는데요. 그 말을 해석하자면 "바보 같은 놈!"이였습니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여러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에 대해 관대한 축에 속했던 온건파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을 온건하게 대해왔던 자신을 한국인 스스로 쏴 죽이려 했다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의 말이기도 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병의 원흉이었을까?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병의 원흉이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이토 히로부미는 정말 한일합병의 원흉이었을까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암상당하지 않았으면 조선은 정말 독립국으로 남을 수 있었을지에 대해 살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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