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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병의 원흉이었을까?

by 곤솔이 2023. 1. 16.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이토 히로부미는 정말 한일합병의 원흉이었을까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암상당하지 않았으면 조선은 정말 독립국으로 남을 수 있었을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

서양의 기술과 문화를 다 받아들이려했던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야마구치 현,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원래 성은 이토가 아니라 하야시였으나 아버지가 이토 가문의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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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의 총에 맞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러시아와의 외교를 위해 만주시찰을 나가던 길에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 정부의 재무상 코콥초프와 의장대에 사열했다가 우리의 안중근 의사에게 피격당했습니다. 당시 총에 맞았던 이토는 응급처치를 받으며 누가 쏘았냐고 물었는데요. 한국인이 쐈다는 말을 들은 이토는 "바카나야쓰!"라는 말을 남기며 사망하게 됩니다. 그 말을 해석하자면 "바보 같은 놈!"이었습니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에 대해 관대한 축에 속했던 온건파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을 온건하게 대해왔던 자신을 한국인 스스로 쏴 죽이려 했다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의 말이기도 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병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사실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에게는 한일합병의 원흉이라고 알고있지만, 사실 그는 야마가타 아리모토 같은 일본의 군부 강경파와는 그 노선이 달랐습니다. 조선에 대해 온건하고 회유적인 노선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었죠. 세계외교를 보는 눈이나 정치에 있어서는 서방세계의 비스마르크, 청나라의 리홍장에 비견될 만큼 대단한 국제정치가로 인정받았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정계에서 40여 년간 장관, 총리, 전권대사, 정당 총재, 추밀원 의장 등 안 해본 요직은 없이 전부 거친 그야말로 베타랑 중의 베테랑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조선과 중국 등 일제의 압제를 받고 있던 민족은 일제히 환호했지만, 서양 열강들은 일본을 동정했는데요. 영국 유력지 <타임스>의 논평에 따르면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에서 일본 정책과 통치에 압제적이고 강압적 성격을 거부하고 융화적 성격을 각인하고 시도하려 했던 인물이었다면서 온건파 이토를 암살한 사실에 대해 의아함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일합병의 빌미를 제공했다

온건파이자 가장 큰 정치권력자였던 이토가 죽자마자 한일합병 방침을 정해놓고 기회를 엿보던 일본 강경파들은 이를 계기로 한일합병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죠. 아이러니하게도 안중근의사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이토를 죽였지만, 결국 그 일을 계기로 한일합병이 더욱 빠르게 진행된 셈입니다. 불과 이토가 죽은 지 일곱 달 만인 1910년 8월 29일이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이야기는 없지만 온건파 이토의 죽음이 한일합병을 앞당긴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실제로 한일합병 방침이 정부 내에 결정되기 전에 한국을 보호국으로 통치하는 것이 경제적 비용상으로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도한 이토 히로부미는 식민통치에 대해 프랑스식 동화주의 정치보다는 자치를 인정해 주는 영국식 통치를 선호했다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유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만큼 그 영향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암살되지 않았다면 정말 한일합병이 안되었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토 히로부미가 살아있었다면 한일합병이 안될 수 있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죽을 당시 69살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건강상태로 보면 10년은 충분히 더 살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다고 하는데요.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민중, 신문기자 등에 대한 연설자리에서 병합은 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의 독립을 침해하지는 않는다고 누누이 공언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입장을 선전하고 한국인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한복까지 입었었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조선을 정말 완전한 독립국으로 놔둘 생각이었냐고 묻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것입니다.


그의 보호국 구상도 사실은 식민지배에 필요한 행정, 사법기관과 교육기관 설치, 급격한 정세변화에 따른 방위 비용 증대 등 경제적 문제나 국제정세 때문이었으니까요.
실제로 오가와 헤이키치는 이토가 한일합병을 반대한 것은 조선을 살린다기보다는 말려 죽이려는 방침이었을 것이라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태평양전쟁과 세계대전 참전도 막을 수 있을 것이란 일부 주장도 사실 너무나 억측으로 보입니다. 그는 실제로 타협주의자, 온건주의자였지만, 일본의 군부세력을 거스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대외 팽창으로 돌진하는 일본 군부를 통제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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